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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Jaro Larnos


고등학교 3학년 때 바둑에 재미를 처음 느꼈습니다. 수업시간에 몰래 모눈종이를 가지고 친구와 연필로 두고 놀았었죠. 재수할 때는 온라인 바둑 타이젬에서 18급으로 시작해서 1급이 될 때까지 밤마다 두었죠. 따로 누군가에게 배운 적은 없이, 그때도 책을 사모으면서 혼자 배웠던 것 같습니다.


바둑이 참 무서운 게 바둑을 두기 시작하면 한 판으로 끝난 적이 별로 없습니다 한 잔만 하고 끝나는 술자리가 드문 것처럼. 내가 이기면 기분 좋아서 또 두고, 지면 분해서 상대에게 다시 두자고 하다 보면, 4~5시간이 훅 지나갑니다. 바둑이 신선놀음이라는 옛이야기는 정말 틀린 말이 아니더군요. 


히카루의 바둑 완전판 1 - 10점
호타 유미 지음/서울문화사(만화)


만화 "히카루의 바둑 (고스트 바둑왕)"을 접했던 게 그때 쯤인 것 같습니다. 굉장히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이 만화는 신기하게도 바둑판에서 일어나는 바둑 내용은 거의 묘사하지 않는데, 읽고 있으면 바둑이 두고 싶어집니다.


애니메이션 <히카루의 바둑>의 한 장면 ⓒTV Tokyo


이런 식으로 읽는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하고 싶도록 만드는 작품이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슬램덩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전에는 키가 큰 아이들은 대부분 배구를 하려고 했었는데, 슬램덩크라는 작품이 나온 이후 그 대상이 농구로 바뀌어버렸죠.


다케히코 이노우에의 만화 <슬램덩크>


바둑과는 다른 얘기지만, 개인적인 바람으로 제가 매우 좋아하는 전략 게임인 포커도 이와 같은 좋은 컨텐츠가 나오면 좋겠습니다. 한국에서는 "포커=도박"이라는 낙인이 찍혀있어서 굉장히 안타깝습니다. 미국만 해도 포커는 가정에서 아이와 어른이 함께 즐기는 가족 게임이면서 동시에 스포츠 채널인 ESPN에서 매년 중계하는 마인드 스포츠로 인정받고 있는데 참 부럽습니다. 


ESPN의 <World Series of Poker> 중계 장면


최근 한국 최고의 프로 게이머인 임요환 선수가 포커계에 뛰어들면서 건전한 스포츠 문화로 만들고 싶다고 했었죠. 사람들의 생각에 조금이나마 변화가 생기길 기대를 해봅니다.


동아닷컴 : 'e스포츠 황제' 임요환, 프로 포커 플레이어 전향…‘베르트랑 기다려라’


세계 바둑계는 90년대를 넘어오면서 현대 바둑을 꽃피웠던 일본이 세대 교체에 망설이는 사이, 국가의 힘으로 무섭게 발전한 중국개인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세계 최강자들을 보유한 한국이 점령해버렸죠. 히카루의 바둑은 그런 일본 바둑에 다시 희망을 넣어주었던 작품입니다. 그 효과가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최소한 아이들에게 바둑이라는 세계에 흥미를 갖게 해주는데 큰 역할을 했죠.


이런 만화의 영향력을 빼더라도, 히카루의 바둑은 참 재밌게 읽었습니다. 물론 아쉬웠던 점도 많았죠.


우선, 이 만화가 10대 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그려졌다는 점입니다. 그러다보니 만화의 전체적인 대결 구도가 "소년 만화"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더군요. 쉽게 말하면 별로 "사실적"이지 않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애당초 소재가 "바둑"일 뿐이지 이 만화는 바둑 만화가 아닙니다. 오히려 재미있는 "소년 만화"라고 할 수 있지요. 물론 바둑이라는 멋진 소재로 만들어진.


그리고 앞선 이유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아쉬움인데, 이 만화가 바둑 속에 있는 재미들을 별로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바둑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바둑 속의 즐거움이 있습니다. 제가 바둑 속에서 느낀 가장 큰 즐거움은 상대를 힘으로 짓누르는 쾌감.. "나만의 스타일"을 추구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히카루의 바둑은 등장인물들의 바둑을 "스타일"이 아닌 "강한 정도"만 보여준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마치 토리야마 아키라의 드래곤볼 같이.


애니메이션 <드래곤볼 Z>의 한 장면


특히 압도적인 "강함"이 주는 카타르시스와 "성장"하는 아이를 보는 기쁨을 느끼게 해준달까요? 그런 작품들 저도 무척 좋아합니다. 하지만 "전문적인 소재"를 다루는 작품에서는 그 분야 속에 조금이라도 들어가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히카루의 바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뭐랄까... 전형적인 만화 캐릭터들이죠. 종종 손발이 좀 오그라드는 대사도 많이 날리구요. 저는 "바둑을 두는 사람"들을 조금 더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내용을 보고 싶었습니다. 프로로서 바둑을 두는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바둑을 두고 있는가를 보고 싶었습니다.


물론 히카루의 바둑이 "바둑을 모르고 그린 만화"는 결코 아닙니다. 실제로 스토리를 쓴 홋타 유미 작가는 자료 조사를 위해서 한국까지도 와서 자세히 취재를 하고 갔습니다. 만화상에서도 당시 세계 바둑계의 분위기를 잘 묘사하려고 노력했죠. (한국 캐릭터 '고영하'의 집이 당시 촬영했던 바둑기사 박영훈 9단의 집과 똑같았다는 에피소드도 있었죠. (조선일보 기사))


다만 히카루의 바둑이라는 만화는 애당초 사실적인 인물을 좀 포기하고, 아이들이 흥미롭게 읽을 수 있도록 하는 "캐릭터"를 효과적으로 이용하기를 선택한 만화인 거죠.


제 욕심을 채워준 만화는 그로부터 얼마 뒤 발견했습니다. "바둑 삼국지", 그것도 우리 나라 만화였죠. 이 굉장한 만화는 다음 편에 소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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