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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겨울왕국 Frozen>의 배경 ⓒ소니픽쳐스 릴리징 월트디즈니 스튜디오스 코리아(주)


경고 : 이 글에는 애니메이션 "겨울 왕국"의 스토리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겨울왕국의 배경이 되는 공간들도 굉장히 상징적입니다. 주요 무대는 셋 입니다. 바다, 그리고 그 사이에 물 위에 떠있는 듯한 성.


Photo by José Luis Mieza


산과 바다는 꿈 속에서도 신화에서도 매우 자주 등장하는 공간입니다. 일반적으로 바다"무의식"의 공간, "의식"의 공간입니다. 프로이트는 정신을 지형학적으로 구분하면 의식과 무의식, 그리고 중간에 전의식이 있다고 주장했었죠. 겨울왕국의 무대는 그런 정신의 구조를 그대로 배경으로 옮겨놓은 것 같습니다.


바다가 거대한 무의식을 상징한다는 것은 꿈을 그대로 시각화했던 영화, "인셉션"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영화에서는 영화 시작과 후반에 볼 수 있는 꿈 속의 바다를 "무의식의 바다"라고 말하죠. 참 직접적인 표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겨울 왕국에서는 "성"이 참 중요한 곳에 있습니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 있죠.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소통의 통로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겨울왕국에서 엘사는 성에서 나와서 북쪽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전의식의 공간(물 위의 성)에서 의식의 공간(산)으로 이동겁니다.


프로이트는 정신 장애의 치료란, 무의식에 있는 것을 의식으로 끌어올려 알아차리게 하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이는 정신적 "성장"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엘사가 성을 벗어나 산으로 간 것은, 오랜 시간동안 꾹꾹 눌러두었던 무의식이 드디어 의식으로 올라왔다는 것인 셈이죠. 정신적 성숙의 시작입니다.


의식으로 올라온 "무의식"이란, 융이 말했던 그림자라고 생각합니다.


Photo by Gary McNair

흔히 우리는 착하고 바르다 good 는 말과 온전한 혹은 전일적 whole 이라는 말을 혼동한다. 마치 일생을 통해 선을 행하고 성인의 자질을 계발하면 우리 안에 빛으로 가득 채워져서 어두움은 저절로 사라질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심층심리학에서는 전혀 다른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듯 빛으로 어두움을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빛을 밝히면 밝힐수록 어두움 또한 확대된다는 것이다.


...흔히 술에 취하거나, 실연을 당했거나, 콤플렉스에 강하게 지배받을 때 그림자가 행동으로 옮겨진다. 이럴 때 평상시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행동을 하게 되는데, 이때가 바로 우리 각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그림자의 정체를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다.


- 로버트 존슨, "당신의 그림자가 울고 있다" 중 옮긴이의 말에서


저는 그림자란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스스로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게 된 자신의 부분이라고 이해합니다. 주목해야 하는 점은 이 그림자를 우리가 외면할 수록 오히려 그 힘이 강해진다는 점입니다. 강해진 그림자는 의식의 빈틈을 찾아서 뚫고 올라올 기회를 노립니다.


엘사는 안나에게 감정적인 압박을 받다가 자신의 본 모습을 드러냅니다. 어린 시절부터 끊임없이 억눌러온 엘사의 "마법"이 통제 불능 상태로 마구 튀어나가죠. 이는 우리도 일상 속에서 종종 보는 장면입니다.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서.


우리가 피곤하거나 압박을 받을 때마다 또 다른 성격이 뚫고 나옵니다. 예를 들어 마음씨 좋고 남을 잘 도와주던 사람이 갑자기 무례하게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을 제쳐놓으며 심술궂어집니다. 또 사람들이 독감에 걸리거나 아플 때, 갑자기 그림자가 뚫고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지요.


...경찰과 범인이 서로 그림자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 또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많은 경찰들은 범인이라는 껍데기를 쓴 자기 자신의 그림자와 싸우고 있는 것이며, 만일 그들이 경찰이 되지 않았더라면 범죄자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는 범죄학자들에게 이미 잘 알려진 한 가지 예에 지나지 않아요.


...만일 사람들이 당신에게 해를 끼친다면 그들을 미워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누군가 당신에게 특별히 해를 끼치지 않았는데도 그 사람이 방에 들어올 때마다 미치도록 짜증이 난다면 그것이 그림자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앉아서 그 사람의 성격을 종이에 써보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며 "이게 나야."라고 말해 보십시오. 나는 열여덟살에 그렇게 해 보았는데, 너무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지고 그 일을 마칠 때는 땀에 젖어 얼굴이 파랗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그림자를 보는 것은 정말 충격입니다.


- Fraser Boa, "융학파의 꿈해석" 중 마리 루이제 폰 프란츠 박사의 말


Photo by Phil Long


그림자와 대면하는 것은 엄청난 충격과 공포지만, 이 그림자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굉장한 에너지를 얻게 됩니다. 그림자에 어떤 가치가 담겨 있는지는 성공회 신부이자 분석심리학자인 잭 샌포드의 말에 잘 담겨있습니다.


자아는 원래 자기 방어를 하고 자기의 야망을 좇기 때문에 방해가 되는 것은 뭐든지 억압해야 한다. 이 억압된 요소가 그림자가 된다. 그림자는 근본적으로 긍정적인 특질을 지니고 있다.


...궁극적으로 하느님(혹은 자기 Self)은 자아보다 그림자를 선호하신다. 그림자는 아주 위험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중심, 즉 진정한 우리 자신과 훨씬 가깝다.


- 로버트 존슨, "당신의 그림자가 울고 있다" 중 잭 샌포드의 말 인용부분


엘사라는 존재, 그리고 엘사의 "위험하면서도 놀라운 마법 능력"은 우리의 그림자와 그 그림자가 가지고 있는 놀라운 잠재력을 상징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잠재력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단어는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달란트"인 것 같습니다. 우리 안에 수용된 그림자는 삶에 굉장한 에너지를 가져다 줍니다. 창조성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Let it go를 부르는 장면에서 엘사는 자기 힘을 마음껏 발휘하면서 웅장하고 아름다운 성을 만들었죠. 그림자 속에 있는 "창조성"을 사용하기 시작한 겁니다.


...어떤 예술가들은 최종 산물인 자신의 창작품에 어두움을 포함시켜서 그림자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광의의 창의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이것이 순수 천재성이다. 이런 예술작품의 특질을 전일성, 건강, 신성함으로 들 수 있다.


작품의 생명력은 생기가 없는 일방적인 선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성의 다양한 측면을 다 포괄하는 데에서 발생한다. 본래 성인(聖人)의 특질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 로버트 존슨, "당신의 그림자가 울고 있다"


이 그림자를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전 편(겨울왕국 : 꿈 상징으로 바라보기 (1)) 에서 언급했었던, 문을 열고 나온 세상에서 마주친 늑대, 거인, 호랑이 같은 "바깥의 적"들보다 사실 더 힘겨운 상대는 "내 안의 적"이죠.


해님달님에서 호랑이보다 더 큰 문제는 어리석고 순진한 오누이 자신들이었고, 진격의 거인에서 에렌이 가장 고통스러웠던 상대는 거인이라기보다 동료였었고, 엘사가 가장 힘들어했던 이유 역시 결국 자기 자신이었죠.


안타깝지만 우리는 절대 그림자로부터 도망칠 수 없습니다. 그림자는 죽을 때까지 우리 삶에 영향을 끼칠 겁니다. 엘사가 아무리 멀리 도망가도 그녀의 힘은 여전히 아렌델 전체에 미치고 있었듯이.


이런 내 자신과의 싸움에서는 필요한 건 "힘"이 아니라 "용기"라고 생각합니다. 


강해지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고

부드러워지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힘이

방어 자세를 버리기 위해서는 용기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느끼기 위해서는 힘이 

자신의 고통과 마주하게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자신의 감정을 숨기기 위해서는 힘이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 받지 않은 것 처럼" (류시화 엮음) 책

'힘과 용기의 차이'에서 뽑은 문장들


이 용기는 "안나"라는 인물로 표현되는 것 같습니다. 안나에 대해서는 다음편에서 좀 더 다루어보죠. 엘사와 안나가 서로를 받아들이면서 성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이 작품은 끝납니다. 마침내 자기 자신을 받아들인 것이 겨울왕국의 결말인 셈이죠.


문득 우리나라에서 개봉되진 않은 뤽 베송 감독의 영화 "엔젤 A(Angel-A)"에서 나온 굉장히 인상깊었던 장면이 떠오릅니다. 매력적인 여자의 모습을 한 안젤라가, 매력이라곤 찾을 수 없는 남자 앙드레를 거울 앞으로 데려와서 뒤에서 껴안으면서 이야기 나누는 장면입니다.


영화 <Angel-A>의 한 장면 ⓒ유로파코프 EuropaCorp


앙드레 :
"사랑해, 안젤라. 니 이름이 뭐든 간에"


Angel-A :

"너가 옳아. 다시 말해봐. 내 이름 빼고."


앙드레 :

"사랑해."


Angel-A :

"좋아. 이제 눈 속의 너 자신을 보고 말해봐."


- 뤽 베송 감독, 영화 "엔젤-A (Angel-A)"


예전에 연애 관계를 유지하는 것에 실패하고서 그 책임이 제 자신에게 있다고 자책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밤 문득, 그동안 제가 얼마나 최선을 다하고 힘들게 노력했는지를 깨닫고, 스스로 가슴을 다독거리며 "고생 많았어, 정말"이라고 소리내어 말했는데 한 참 동안 소리없이 눈물만 흘렸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는 지금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면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다음편에서는 엘사가 가지고 있는 능력과 안나에 초점을 맞춰서 이야기를 더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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