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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Brett Davis


나의 과제는 내가 인간이라는 것을 심사위원들이 확신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다행히 나는 인간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것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분명치 않다.


- 브라이언 크리스찬, "가장 인간적인 인간"


가장 인간적인 인간 - 10점
브라이언 크리스찬 지음, 최호영 옮김/책읽는수요일


이 책은 몇 년 전에 김지은 아나운서가 진행하던 "MBC 라디오 북클럽"에서 소개한 걸 듣고 샀습니다. 너무 재미있어서 사서 읽기 시작한 그 날 절반 이상을 읽었던 것 같습니다.


저자인 브라이언 크리스찬은 브라운 대학교에서 컴퓨터과학철학을 복수 전공했고, 워싱턴 대학교에서 예술석사 학위를 받은 사람으로 과학과 철학에 대한 논픽션 작가입니다. 저자에 대한 소개를 뒤늦게 읽었는데, 책을 읽고 나니 이 책의 주제가 이 작가가 자기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정말 적절한 소재였구나 싶습니다.


매년 인공지능 학계에서는 이 분야에서 가장 큰 기대와 화제를 몰고 다니는 연례행사가 열린다. 바로 튜링 테스트라고 불리는 경기이다. 이 검사의 명칭은 컴퓨터과학의 창시자 중 한 명인 영국의 수학자 앨런 튜링 Alan Turing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1950년에 튜링은 이 분야의 가장 오래된 물음 중 하나에 답을 제시하려고 시도했다. 그것은 바로 "기계도 생각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었다.


...튜링은 이 물음을 순수 이론적인 토대 위에서 논의하는 대신, 한 가지 실험을 제안했다. 그것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두 상대방에게 심사위원단이 컴퓨터 단말기로 이런저런 문제를 낸 뒤에 누가 누구인지를 맞추게 하는 것이다. 그 대결 상대는 바로 인간 '연합군'컴퓨터 프로그램이다. 이때 주고 받는 대화에는 아무런 제한이 없다.


...튜링은 2000년도쯤 되면 컴퓨터가 인간 심사위원들과 5분의 대화를 나눈 뒤 그중 30퍼센트를 속일 수 있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기계가 생각한다고 말해도 별다른 반대에 부딪히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 브라이언 크리스찬, "가장 인간적인 인간"


책의 저자 브라이언 크리스찬은 2009년 튜링 테스트에 '연합군'으로 참가해서 컴퓨터와 대결할 기회를 얻습니다. 대회 관계자들은 저자에게 "당신은 인간이니까 그냥 자기 자신으로 있기만 하면 된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크리스찬은 그동안의 참가자들과는 다르게 이전 대회 기록들을 모두 살펴보고 분석하면서 튜링 테스트에서 인간이 승리하기 위한 전략을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Photo by Mario Sixtus


심사위원은 두 상대방 가운데 한쪽과 5분 대화를 나눈 뒤 다른 쪽과도 5분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10분 동안 생각한 뒤에 둘 중 어느 쪽이 인간이라고 생각하는지를 결정해야 한다. (...) 이렇게 심사위원단의 투표와 확신도 테스트에서 최고의 점수를 얻은 프로그램은 그해의 "가장 인간적인 컴퓨터"라는 타이들을 차지하게 된다.


그런데 이 대회에는 흥미롭게도 또 하나의 타이틀이 걸려 있다. 바로 심사위원단으로부터 가장 많은 투표와 가장 높은 확신도 점수를 얻어낸 연합군 참가자에게 수여되는 "가장 인간적인 인간"이라는 타이틀이다.


지난 1994년 이 타이틀을 가장 먼저 따낸 사람 중의 한 명은 유명한 과학기술 잡기 '와이어드'의 칼럼니스트 찰스 플래트였다. 어떻게 이 상을 타게 되었는지 묻는 사람들에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변덕스럽고 신경질적이며 밉살스럽게 굴었을 뿐입니다."


이 말이 내겐 그저 재미있고 기발하게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것은 내게 좀 더 깊은 의미에서 일종의 무장 명령과도 같았다. 튜링 테스트라는 조건에서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삶 속에서 가장 인간적인 인간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 브라이언 크리스찬, "가장 인간적인 인간"


저자 브라이언 크리스찬은 그동안 프로그램들이 심사위원들을 속이기 위해 사용했던 효과적인 전략들을 하나씩 찬찬히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그 전략들을 무너뜨릴 수 있고 "인간"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지 알려줍니다. 이 책이 재밌을 뿐만 아니라 깊이가 있는 이유는, 바로 이 과정에서 "무엇이 인간다움"인지 조금씩 궁금해지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인간다움"에 대한 평소 생각을 바꾸기도 했고, 몰랐던 관점을 많이 배우기도 했습니다.


한때 인간은 구문 규칙이 있는 언어를 사용하는 유일한 동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한때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는 유일한 동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사실이 아니다. 


한때 인간은 수학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계산기가 할 수 있는 것을 따라가기도 벅차다.


- 브라이언 크리스찬, "가장 인간적인 인간"


역사적으로 사람들은 끊임없이 "인간"만의 특징을 찾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인간만의 특징을 찾기 위해서는 비교할 대상이 필요하고 언제나 그 대상은 대부분 동물이었죠. 인간은 가지고 있고 동물은 가지고 있지 않은 특징이 "인간다움"을 보여주는 특징인 겁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우리는 새로운 비교 대상을 만났습니다. 우리가 만들어낸 인공지능이죠. 흔히 로봇과 인공지능을 "인간을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합니다. 이 책은 조금 다른 관점을 보여줍니다.


아래의 인용구는 인간이 체스 게임에서 컴퓨터에게 패배한 사건에 대한 클로드 섀넌의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체스를 잘 두려면 '사고'가 필요하다고 간주되어 왔다. 따라서 이 문제를 풀려면 우리는 기계화된 사고의 가능성을 인정하거나 아니면 '사고'라는 개념을 더 좁힐 수밖에 없을 것이다."


- 클로드 섀넌


"사고라는 개념을 더 좁힌다"는 부분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사고"라는 말에 그동안 알지 못했던 이물질이 붙어있는 것을 깨닫고 제거한다는 뜻으로 봅니다.


즉, 인공지능이라는 존재를 통해 우리는 "인간"만의 특징을 좀 더 정확히 알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겁니다. 인공지능이 발달하면서 기계가 인간처럼 변해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간다움"이라고 착각했던 것들을 알려주면서, 인간이 진정한 "인간다움"을 추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겁니다.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은 제 희망사항이지만)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알려주는 메신저인 셈이죠.


...연합군 중에는 셰익스피어 전문가 신시아 클레이가 있었다. 그녀는 잘 알려졌듯이 세 명의 심사위원에 의해 컴퓨터로 간주되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어떤 사람도 셰익스피어에 대해 그렇게 많이 알 수 없다."라는 의견을 보였다.


- 브라이언 크리스찬, "가장 인간적인 인간"


무엇이 인간다운 것일까요? 1997년 체스에서 "딥블루"의 승리는 논리적 사고가 인간만의 것이 아님이 증명한 것이라 봅니다. 책에는 없지만 최근에는 바둑에서도 인공지능이 프로 기사와 넉 점을 깔고 대등하게 둘 정도가 되었죠. (동아일보 "조치훈 9단과 둔 4점 접바둑에서 이긴 인공지능 SW ‘돌바람") 신시아 클레이의 예처럼 지식도 이미 인간다운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2011년 IBM의 "왓슨"은 퀴즈쇼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했죠. 이런 인공지능과의 대결로부터 밝혀낸 진정한 "인간다움"은 어떤 것들인지 저자는 쉽게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서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영화 <모던 타임즈 Modern Times>의 한 장면 Janus Films/Criterion


5분 간의 채팅을 통해 자신이 인간임을 드러내는 대결에서 아직까지 우리는 70% 정도의 우위를 지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공지능들이 매년 조금씩 승률을 올리고 있습니다. 이는 단지 인공지능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 책은 기계가 인간에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인간이 기계에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도 있다고 지적합니다.


옥스퍼드 대학교 철학자 존 루카스는 만약 기계가 튜링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하도록 우리가 막지 못한다면, 그것은 "기계가 그만큼 지능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류가 또는 적어도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무뚝뚝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요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튜링 테스트는 기술의 진보를 측정하는 척도이기에 앞서, 그리고 그것이 제기하는 철학적, 생물학적, 도덕적 물음들에 앞서, 근본적으로 소통 행위에 관한 검사이다. 그렇기 때문에 튜링 테스트가 제기하는 가장 근본적인 물음은 매우 실제적인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언어와 시간의 제약 속에서 어떻게 하면 최대한 의미 있게 서로 관계를 맺는가? 공감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누군가가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와 우리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은 어떤 과정을 통해서인가?


이것들이 튜링 테스트의 가장 핵심적인 물음, 다시 말해 인간다움의 가장 핵심적인 물음일 것이다.


튜링 테스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프로그램들을 연구하면서 깨달은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것이 결국에는 정서적 친밀함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대화가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대한 뻔뻔하고도 진지한 연구라는 점이다. 튜링 테스트의 과거 기록을 살펴보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점잖게 상대의 질문을 피하고, 분위기를 밝게 하면서 주제를 바꾸고, 주의를 분산시켜며 시간을 때우는 다양한 방법을 살펴보는 것이다.


- 브라이언 크리스찬, "가장 인간적인 인간"


과연 나는 정서적 친밀감이 없는 상태에서 하는 대화를 얼마나 자주 하고 있는가? 내가 지금 하루 동안 타인과 나누는 대화가 혹시 컴퓨터도 할 수 있는 수준의 대화인 것은 아닐까? 나는 얼마나 "인간"으로서 살고 있는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때, 그저 시간을 때우는 대화를 얼마나 하고 있었는지 문득 스스로를 돌아봅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전화번호 안내에 여러 번 전화를 걸었는데, 그곳 사람들은 거의 비인간적일 만큼 최대한 간결하고 무뚝뚝하게 답변했다. 그들과 나의 상호작용이 어떤 의미에서 '인간적'이라면, 그것은 단지 버스에서 낯선 사람이 내 발을 밟아 얼굴을 찌푸리게 되는 것이 '인간적'인 것과 똑같은 의미 정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들의 잘못은 아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로봇처럼 행동할 뿐이다.


...그런데 바로 오늘 나는 새 신용카드를 등록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가 상대방 여성과 거의 10분이나 수다를 떨게 되었다. 눈 내리는 북부 콜로라도에서 일하는 그녀는 날씨가 좀 따뜻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고, 비 내리는 시애틀에서 전화를 건 나는 이 겨울이 좀 더 겨울다웠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뉴저지 해안지방 출신인 나는 어릴 때부터 눈 내리는 겨울과 무더운 여름에 익숙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북서부의 온화한 기후에 흠뻑 빠지기도 하고 때로는 북동부의 강렬한 날씨가 그립기도 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녀는 해안이나 바다를 여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며 나를 부러워했다. 그러는 사이에 내 룸메이트가 거실을 지나갔는데, 그는 틀림없이 내가 아주 오래된 친구와 통화하는 줄 알았을 것이다. 마침내 카드가 등록되었고 나는 옛 카드를 가위로 싹둑 잘라버리면서 그녀에게 진심어린 작별인사를 고했다.


어쩌면 우리는 기계를 경험하고 나서야 비로소 인간의 진가를 알게 된 것일지 모른다. 영화 평론가 폴린 카엘은 이렇게 말했다. "쓰레기가 우리에게 예술에 대한 갈망을 심어주었다." 비인간적인 것은 우리에게 인간적인 것에 대한 갈망을 심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것이 진정 무엇인지 깨닫게 해준다.


- 브라이언 크리스찬, "가장 인간적인 인간"


저자의 생각에 매우 동의합니다. 위의 사례를 읽다가 떠오른 글이 있습니다. 박이언님의 블로그 "직장학교"에서 언급한 미국 자포스라는 전자상거래 기업에 대한 포스트의 사례와 매우 유사했습니다.


...자포스의 콜센터에는 건당 콜의 제한 시간이 없다. 업무시간 중 본인의 80% 이상만 고객을 응대하면 된다. 하루 5천콜 이상을 소화하는 콜센터의 직원들은 전적으로 본인들의 판단으로 개별 콜을 관리한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현재까지의 최장 콜 응대는 10시간 29분이다. 미국 중서부에 사는 한 대학생은 어그부츠를 주문하려고 전화를 했다가 자포스가 라스베가스에 있는 걸 알고 라스베가스에서의 생활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그 대학생은 이전부터 라스베가스로 이사할 것을 고려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대화는 영화, 음식, 그리고 심지어 인생에 대한 주제로 이어졌다. 이 일화는 자포스에게 예외적인 것은 아니다. 이전의 기록은 8시간 47분으로 알려져있다.


- 박이언님의 블로그 "직장학교", [연재: 기업들아 착해져라] - 1


...인간중심의 경영 가능성은 시대가 보다 더 인본주의가 되었기 때문이지 경영자가 천재적인 신기법을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 박이언님의 블로그 "직장학교", "[연재: 기업들아 착해져라] - 3"


자포스의 콜센터 직원과 한국의 일반적인 콜센터 직원이 튜링 테스트에서 맞붙는다면 누가 인간으로 선택될까요? 사람들의 심리적인 변화에 가장 발빠르게 대응하는 건 역시 기업인 것 같습니다. 기업들의 이런 변화는 우리가 얼마나 인간적인 것들을 원하고 있는지, 반대로 말하면 현재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비인간적"인지 말해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ps. 참고로 2014년 대회에서 튜링의 예언이 이루어졌습니다. "유진 구스트만 Eugene Goostman"이 심사위원 30퍼센트를 속였습니다. 물론 이 프로그램이 영악하게도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13세 소년"이라고 캐릭터를 설정한 것 때문에 논란이 좀 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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