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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시절부터 지금까지, 근 10여년간 영어는 항상 내 발목을 잡아왔다. 효과적인 영어 공부 방법을 찾아해매기도 했고, 이런저런 방법들을 혼자서 열심히 시도해왔다. 예전에 권희섭님의 영어 학습법 글을 정리한 것도 그런 시도 중 하나였다.

허나 그 어떤 방법도 나에게는 잘 맞지 않았던 것 같다. 아무리 누군가가 효과를 본 방법일지라도, 나에게 맞지 않으면 소용없다는 걸 체감했다. 근육을 빠르게 키우기 위해선 매일 매일 헬스장에 가는 것이 당연히 효과적이다. 근데 내가 매일 갈 수 있는 사람인가? 매일 하루 10시간 이상을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나에게는 2시간에 한 번씩 나가서 짧게라도 산책하고 돌아오는게 훨씬 실천 가능성이 높다. 아무리 좋은 방법이라도 실천하기 어렵다면 가치가 없다. 

 

특히 나같이 독학으로 영어 공부를 하는 경우, 외부 압박이 없기 때문에 더욱 실천 가능성이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요즘 시도하고 있는 방법은 나의 수준에 맞추는 방법이다. 내가 읽을만한 수준의 좋은 영어 컨텐츠를 많이 접하는 거다. 이런 방식의 시도를 하게된 것은 크라센 교수의 "읽기 혁명"이다. 

스티븐 크라센(Stephen D. Krashen)은 남 캘리포니아 대학의 교육학 교수로, 외국어 습득 이론을 정립한 언어학자이다. 그는 자연 접근법(Natural Approach)를 통한 영어 교수법을 만든 사람이다. 그의 오랜 연구 결과를 정리한 책이 "읽기 혁명" (The Power of Reading)이다.

책보다 영상이 더 편안한 사람은 크라센 교수의 아래 영상을 시청하길 권한다. 사람이 언어를 습득하는 방법에 대한 가장 중요한 원리를 쉽게 설명해준다.

크라센 교수는 모든 인간이 "컴프리핸시브 인풋" (CI: Comprehensive Input)을 통해서 언어를 습득한다고 주장한다. CI란 문장의 단어나 구조를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언어적 경험을 말한다. 

이를 위해 내가 시도한 영어 듣기 공부 방법은 수십번 반복해서 봤던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이다. 영어 더빙으로 자막 없이. 장면만 봐도 어떤 대사가 오가는지 알고 있는 작품들이기 때문에 자막이 필요없다. 넷플릭스(Netflix)에서 스튜디오 지브리(Studio Ghibli) 애니메이션 중 알고 있는 작품을 골라서 하나씩 오가는 지하철에서 틈틈히 보았다.

내가 이런 방식으로 시청한 것은 6개 작품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바람의 계곡의 나우시카, 천공의 성 라퓨타, 붉은 돼지, 원령공주, 귀를 기울이면. 모두 내가 이미 10번 이상 반복해서 본 지브리 작품들이다. 덕분에 각 장면마다 어떤 영어 대사가 오고 가는지 언뜻언뜻 들으면서 재밌게 애니메이션을 봤다. 

다시 생각해보면, 이런 애니메이션은 영어 학습에 있어서 또 다른 장점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초등학생 아이들도 볼 수 있도록 만들어진 작품이라 어휘가 어렵지 않고, 문장도 복잡하지 않기 때문에 좋다는 점. 그리고 애니메이션은 대사가 없는 장면들이 많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익숙치 않은 영어 대사를 집중해서 귀 기울이는 건 꽤나 지치는 일이다. 예전에 미국 드라마 프랜즈로 영어 공부를 시도한 적이 있다. 그런데 거의 모든 장면이 많은 대사로 가득차 있어서 금방 지쳐서 학습을 지속하지 못했다. 그에 반해 애니메이션은 대사가 없는 장면들이 일종의 휴식 공간이 되어서 크게 지치지 않고 끝까지 시청할 수 있게 해주었다. 혼자 영어 공부를 하는 사람이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은 학습 포기다. 절대 무리해서 나가떨어지면 안된다. 

다만 이제 또 다른 애니메이션을 찾지 못하고 있어서 고민이다. 차선책으로 재밌어보이는 넷플릭스의 애니메이션을 영어 더빙 + 한글 자막으로 보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 

또 다른 시도로는 영어 텍스트를 읽는 것도 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내용을 알고 싶은" 책이면서 동시에 "수준에 맞는" 책을 골라야 하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만족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우선 수준에 맞는 책들 중에서, 읽고 싶은 책을 고르기로 했다.

수준에 맞는 책은 아래의 시리즈를 통해서 찾았다. Oxford Bookworms Library와 MacMillan Readers 시리즈다. 

이 두 시리즈는 유명한 소설 작품들을 영어 읽기 수준에 맞게 풀어쓴 책들이다. 각 레벨별로 사용하는 어휘의 양이 다르다. 각 레벨마다 어떤 수준의 읽기 실력이 필요한지 샘플 페이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한 페이지 내에서 모르는 어휘나 문장이 1~2개 이하인 수준이 좋다. 그보다 모르는 것이 많아지면, 읽으면서 내용에 집중하는 것이 방해받는다. 우리는 이들 책을 읽으면서 책의 내용을 즐겨야 한다. 모든 영어 문장을 분석하면서 읽는 것을 목표로 하면 안된다. 그런 식의 읽기는 수능 영어 시험 준비와 다를바 없지 않는가?

후에 찾아보니 영어 읽기 수준을 수치화한 렉사일 지수(Lexile Index)가 있더라. 내 수준은 대충 살펴보니 한 700L 정도 되는 듯 하다. 이정도면 미국 3~4학년 수준이 아닐까 싶다. 

국내 유명한 서점들의 인터넷 사이트를 가보면, 외국 서적들을 이 렉사일 지수에 따라서 분류해놓았다. 개인적으로는 아래 셋 중 알라딘이 가장 책을 고르기 좋은 것 같다.

- 예스24(Yes24) 렉사일 지수 분류
- 알라딘(Aladin) 렉사일 지수 분류
- 교보문고(Kyobo) 렉사일 주소 분류

이 수준별 책을 고를 수 있는 덕분에 나는 평소에 궁금했지만 읽어보지 않는 고전 작품들을 읽을 수 있었다. 로빈슨 크루소, 오즈의 마법사, 애드거 앨런 포의 검은 고양이 등 유명하고 흥미가 있었지만 못 읽었던 소설들을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나는 늘 내 수준보다 너무 어려운 영어들을 접해야 했다. 대학원 논문들을 읽어야 했고, 빠른 대사를 들으면서 조금이라도 내용 파악하려고 애써야 했다. 그러다보니 영어라는 것 자체가 나에겐 너무 피곤하고 힘든 존재가 되어버렸었다. 나에게 맞지 않는 방식이었던 거다.

운동에 비유하자면, 근육도 부족한 주제에 너무 무거운 무게를 들려고 시도한 것이다. 제대로된 자세로 한 번도 들어올리지 못하고, 중간에 고꾸라진다. 힘은 힘대로 썼지만, 나가떨어지고 성취감도 재미도 얻기 힘들 것이다. 그 결과 지속하지 못한다. 

결국 나에게 맞는 수준을 찾는게 중요하다. 맞는 수준인지는 어떻게 알까? 내가 재밌게 내용을 끝까지 읽고 있다면, 그건 나에게 맞는 수준이다. 만약 내가 중간에 멈추거나 읽기 싫어진다면, 그건 나에게 맞지 않는 수준이란 뜻이다. 

내가 읽고 싶은 내용을, 읽고 싶은 수준으로 많이 읽는 것. 그게 내가 크라센 교수로부터 얻은 소중한 영어 학습법이다. 만약 나와 같이 끈기가 부족하고, 기존 영어 학습 방법을 지속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위의 방법을 참고해서 자신만의 방식을 찾길 기원한다. 나의 경험이 작은 힌트라도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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