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테이블 위에서 (On The Table)


 (3) 잘하고 싶은 마음과 리플레이성

 

보드게임이든, 어떤 분야의 게임이든 상관없지만, 게임을 하는 동안 내 자신이 그냥 "즐기는 시간"으로 만족하는 경우와는 다르게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을 불러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전자의 경우는 게임을 마치고 나면 그 시간이 새로운 경험을 즐긴 만족감으로 다가오지만, 후자의 경우는 자신의 선택들에 대한 아쉬움이 계속 머리에 떠오르며 남는다. 그 마음에 "다음 번에는 좀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고, 그래서 내가 원하는 데로 해보고 싶다."이다.



(출처: Flickr https://www.flickr.com/photos/rogerjones/2671284687/)

 

필자에게 이런 마음을 떠오르게 하는 게임들의 목록을 하나씩 떠올려보면, 그동안 가장 많이 플레이한 게임들이었다. 고등학교와 재수 시절은 "바둑"이었고, 대학원 시절에는 "포커"였고, 보드게임를 다시 시작한 2년 전쯤에는 "푸에르토 리코", "하나비","기프 시리즈"였고, 지금은 "마작", "1862"등이 그들이다. 이들을 잘하기 위해서 여러 번 게임을 플레이 했고, 더 좋은 점수를 내기 위해 전략을 책이나 글을 통해서 뒤져보고 노력했었다.

 

계속 해서 다시 하면서 실력을 향상시키고 싶은 게임, 그게 아마 리플레이성이 높은 전략 게임이란 뜻일 것이다.

 

푸코

하나비

기프

 

비록 필자는 싫어하지만, "티츄", 아그리콜라", 테라 미스티카", "테라 포밍 마스"등도 그렇게 한 게임을 수 십판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면 위에서 말한 높은 리플레이성이 이들에게도 있는 듯하다.

 

그런데 "어떤 게임"들이 이런 반응을 이끌어 내는 것일까? 이 리플레이성은 "학습 곡선"과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학습 곡선(Learning Curve)이란, 어떤 기술이나 지식 등을 배우기 위한 학습 비용(시간)과 숙련도(실력)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는 곡선이다. 예를 들어, 게임이 매우 쉬워서 누구나 빨리 배운다면 그 게임의 학습 곡선은 아래 붉은 그래프(A) 와 같이 기울기가 가파르게 상승하는 형태가 된다. 다시 할 때마다 실력이 금방 금방 빠르게 상승한다는 뜻이다. 반대로 규칙이 많고, 어렵거나, 용어들이 익숙하지 않거나, 등 알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서 한 두 번 해봐서는 능숙해지기 힘든 게임은 파란 그래프(B)와 같이 기울기가 완만한 형태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한 두 판 다시 한다고 해서 실력이 크게 상승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학습 곡선

 

학습 곡선의 초반과 그 이후를 구분해야 한다. 보드게임에서 초반 학습 곡선은 "게임의 규칙의 복잡성과 다양성"에 달려있다.

 

규칙 설명이 짧은 게임들은 일반적으로 초반 학습 곡선이 가파르다. 즉, 배우기 쉽다는 뜻이다. "바둑" 같은 경우에는 진입장벽 자체는 낮다. 규칙 자체는 매우 단순하고 직관적이기 때문이다.

 

바둑

(출처: Flickr: https://www.flickr.com/photos/obli/322662164/)

 

반대로 규칙을 설명하는데 한시간 이상까지도 걸리는 게임들은 보통 초반 학습 곡선이 완만하다. 진입장벽이 높다는 뜻이다. 예를들면 "리치 마작"같은 경우에는 진입장벽이 높다. 우선 "용어"들이 낯설고 많으며, 처음에 알아야할 규칙들과 족보들이 상당히 많기 때문이다.

 

마작 이미지

(출처: Flickr https://www.flickr.com/photos/52383843@N07/14135127835/)

 

그러나 게임의 리플레이성을 좌우하는 것은 초반보다는 "중후반 학습 곡선"이다.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하는 것이 좋은지 판단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쉽지 않아"야만 한다. 흔히 "규칙은 간단한데, 이기기는 어려운 게임"이라고 묘사하는 게임은 아래와 같이 초반 학습 곡선은 빠르게 상승하지만 곧 완만해진다는 뜻이다.

 

학습 곡선2

 

반대로 리플레이성이 떨어지는 게임이란, 쉽게 이기는 방법이 드러나는 게임이다. 몇 판 해보면 "아, 이렇게 하면 무조건 이기는 게임이구나"라고 필승 전략이 생기는 순간, 게임을 더이상 하고 싶은 마음이 사그라든다. 이와는 반대로 "이기는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 게임도 마찬가지다. 오로지 운에만 승패가 좌우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게임에서는 "이기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게 된다.

 

필승법

(출처: 만화 라이어 게임 ©학산문화사)

 

따라서 리플레이성이 높은 게임을 만들려면 "이기는 방법이 존재하는" 게임이어야 한다. 아니, 좀 더 정학히 말하자면 "이기는 방법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게임이다. 그와 동시에 "그 방법을 찾기는 적당히 쉽지 않은" 게임이어야 한다.

 

"어떻게 해야 오랫동안 승리 전략을 숨길 수 있을까?"

 

만화 이끼 사진(그림이 눈에 보이게 하믄 안 돼)

(출처: 만화 이끼 3권 중에서 ©윤태호)

 

여러가지를 디자이너들이 시도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2가지 요소는 "운"과 "다양성"이다.

 

"운"은 이기는 방법을 숨기는 아주 좋은 방법이다. 승패가 "운"에 의해 갈리는 게임들이 매우 많다. "포커", "마작" 같은 게임은 최고로 좋은 패가 손에 들어온 사람을 나쁜 패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역전해서 이길 방법은 거의 없다. 한 번의 게임을 좌우하는 것은 "커다란 운"이다. 흔히 운칠기삼이라고, 운 70% 실력 30%이라고 할 정도로 승패는 대부분 운이 결정한다.

 

주사위 이미지

(출처: Flickr https://www.flickr.com/photos/amyashcraft/2358603089/)

 

이 같은 게임에서는 자신이 아무리 올바른 선택을 했음에도 게임에서 질 수 있고, 틀린 선택을 했음에도 게임에서 이길 수 있다. 수십 판 아니, 수백, 수천 게임을 해야만 자신의 선택이 옳은 것이었는지 틀린 것이었는지 판정된다. 선택의 올바름과는 반대되는 결과들이 자주 나타나면서, 이 커다란 운이 플레이어들의 눈을 가리고, "어떤 선택이 옳은 선택인지" 알아채기 어렵게 한다. 


이 "운의 안개"속에서 어렴풋이 보이는 길을 찾아내는 것이 실력 향상의 과정이다.

 

안개 속의 길

(출처: 블로그 포또 http://mono4bia.tistory.com/m/46)

 

두 번째 요소인 "다양성"인데, 다양성 중에서도 "상황의 다양성"이다. 매번 색다른 상황을 플레이어에게 주어야 하며, 그 상황의 변화가 플레이어가 할 수 있는 선택들의 가치를 변화시켜야 한다. 보통 초기 조건의 다양성을 게임에 넣고, 더 나아가서 게임 진행에 따라 상황이 매번 새로울 수 있도록 유도한다.

 

예를 들면, 필자가 좋아하는 "1862"에서는 매 게임 마다 등장하는 회사들이 다르다. 어떤 회사가 등장하느냐 뿐안 아니라 회사의 기차 종류도 매번 달라진다. 그래서, 어떤 회사가 강하고 어떤 회사가 약한지는 그 회사가 "언제 등장 하느냐"와 "어떤 기차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이 게임은 좋은 회사의 주식을 많이 사서 자금을 늘리는 플레이어가 승리하는 게임이기 때문에 매 순간 순간 변화하는 상황에서 어떤 회사가 지금 좋은 상황인지 나쁜 상황인지 잘 판단해야만 한다.

 

1862 이미지

 

다양해야하는 것은 상황이지 선택의 갯수가 아니다. "패치 워크" 같은 경우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선택은 게임 내내 최소 1가지에서 최대 4가지에 불과하다. 그러나 초기에 배치되는 타일들의 순서와 나와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타일들과 그 타일들의 위치에 따라서, 그 선택지 사이의 가치가 변화한다. 할 수 있는 선택의 종류가 적다고 리플레이성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패치 워크 이미지

 

반대로 선택지가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그 선택지들 사이 가치의 변화가 별로 없다면, 이는 리플레이성이 높은 게임이라 하기 어렵다. 필승 전략이 쉽게 드러나는 게임인 셈이다. 흔히 "어떤 테크로 가면 무조건 이긴다."거나, "어떤 카드가 무조건 강하다"라고 자주 언급되는 게임들이 이같이 선택지의 가치를 변동되도록 하는 것에 실패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오랫동안 사랑받는 전략 게임들이란, "승리 전략을 훌륭하게 숨긴" 게임들이다. 따라서 이런 게임의 전략을 질문 할 때 "어떤 테크가 좋나요?" 라던가 "어떤 캐릭터가 강한가요?"라는 질문은 그다지 영양가가 없다. 거기에 모두가 동의하는 대답이 아직 없기 때문에 좋은 게임인 것이다. 그보단 "어떻게 하면 상황 판단을 잘 할 수 있나요?"가 좀 더 도움될 질문이다.

 

 

비록 리플레이성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했지만, 리플레이성이 낮은 게임이 재미없는 게임이고, 리플레이성이 높은 게임이 재미있는 게임인 것은 아니다. 수많은 게임들 중 한 판하고 다시 못할 게임이 얼마나 많은가. 그렇지만, 그 한 판이 커다란 경험과 잊지 못할 기억을 남겨준다면 그 것만으로도 그 게임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마음에 와 닿는 한 장면만으로도 그 영화는 인생 영화가 될 수 있듯이. 레거시 게임이 그런 좋은 예라고 볼 수 있다. 리플레이성이 극도로 낮은 것을 역으로 이용한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각자, 자기 취향에 따라서 다를 뿐이지 이런 "잘하고 싶은 게임"이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 게임만이 아니라 삶에서 지향하는 각자만의 가치를 위해 "잘 살려고" 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들의 삶은 리플레이성이 참 높을 것 같은데 한 번 밖에 못 산다는게 참 아쉽다.


ps. 출처를 넣지 않은 모든 사진은 보드게임긱에서 참고했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