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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용된 사진의 출처는 모두 보드게임긱입니다.


농경은 기차와 함께 보드 게임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테마 중 하나입니다. 바쁜 삶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귀농은 일종의 즐거운 일탈이지요. 게다가 농경 테마는 게임의 메커니즘과 결합시키기도 편한데, 처음에는 승점, 자원과 돈을 조금씩밖에 얻지 못하다가 어느 정도 내 기반이 완성되면 승점, 자원, 돈을 쓸어담을 수 있는 '엔진 빌딩'류의 게임과도 잘 어울리기 때문입니다.

라 그랑하 역시 농사를 지어 작물을 팔아 승점을 버는 엔진 빌딩 게임입니다. 테마와 메커니즘이 잘 어울릴 가능성이 높지요. 하지만 이 칙칙하고 밋밋한 박스 커버를 바라보고 있으면 내심 걱정도 됩니다. 이거 그냥 매년 수없이 나오는 평범하고 영혼 없는 유로게임들 중 하나 아닌가 하고요.



이름 : La Granja

디자이너 : Andreas Odendahl, Michael Keller

제작년도 : 2014

인원 : 1-4인

연령 : 12세 이상

시간 : 90-120분

분류 : 핸드 관리 (다용도 카드), 주사위 드래프팅, 지역 영향력, 동시 액션 선택

보드게임긱 순위 : 89 (2016/8 기준)


라 그랑하의 배경은 스페인 마요르카 섬의 한 농장입니다. 이 지역은 먼 옛날부터 물이 좋아 농사에 적합했다고 합니다. 무어인들이 마요르카 섬을 점령했을 때에도, 레콘키스타를 통해 기독교도들이 이베리아 반도를 수복했을 때에도 이 곳은 대형 농장으로서의 제 역할을 한 모양입니다. 비록 섬 전체가 휴양지가 된 지금 라 그랑하도 예외는 아니지만요.



라 그랑하는 어떻게 하는 게임이냐고 누군가 물어본다면 대답하기 쉽지 않습니다. 어디선가 본 듯한 방식들이 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 행동은 주사위를 사용합니다. 공용의 주사위를 여러 개 굴린 후, 순서대로 하나씩 가져가며 그 눈금에 해당하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행동 중에는 단순히 돈과 작물을 가져오는 것부터 카드를 놓을 수 있게 해주거나 작물을 수송하게 해주기도 합니다.

'엔진'에 해당하는 농장 설비는 카드를 활용하는데, 어디에 카드를 놓느냐에 따라 각 기능이 달라집니다. 개인 보드판 위쪽에 꼽으면 계약서가 되고, 왼쪽에 꼽으면 논밭, 아래에 꼽으면 도우미, 오른쪽에 꼽으면 돼지우리와 추가 수익이 됩니다.



카드를 깔고 주사위로 행동을 한 후엔 작물을 수송하는 페이즈가 시작됩니다. 각 플레이어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4개의 수송 토큰 중 하나를 몰래 골라 동시에 공개를 합니다. 이번 단계에 수송을 적게 하면 대신 오래 쉬게 되고, 이는 휴식 트랙을 전진시킵니다. 수송을 많이 하면 쉬진 못하지만 대신 게약서가 많다면 그만큼 작물을 많이 수송하여 더 많은 승점을 벌어들일 수 있습니다.

휴식 트랙은 턴 순서를 결정하고, 한 번 사용한 토큰은 일정 라운드가 지날 때까지 사용할 수 없기에, 내가 이번 라운드에 총 몇 번의 수송을 해야 적합한지 고민이 필요합니다.



플레이어 한가운데엔 공용 보드판이 있습니다. 일정 작물을 계약서에 맞춰 수송해 보내면 시장에 내 점포를 세울 수 있는데, 내가 점포를 놓으려는 곳 주변에 영향력이 낮은 상대 점포가 있다면 제거할 수 있습니다. 이들 점포들은 꾸준히 승점을 생산해내기 때문에, 제거되지 않도록, 또는 상대방 점포를 제거할 수 있도록 위치를 신중히 결정해야 합니다.

내가 가진 계약서 외에도, 가게에 내 작물을 수송할 수 있습니다. 일정량의 작물을 수송하게 되면 그 가게와 계약을 맺게 되며, 여러 강력한 보너스를 제공합니다.

총 6라운드로 게임이 진행되며,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승점을 벌어들인 플레이어의 농장은 라 그랑하라는 이름으로 영원히 남게 될 것입니다.



이 게임은 어디선가 본듯한 메커니즘들로만 구성되어 있습니다. 공용의 주사위에서 하나씩 골라 행동을 하는 주사위 드래프팅은 이전에 이스파한 등에서 시도된 바가 있으며, 카드의 다용도 활용은 로마에게 영광을에서 대놓고 가져온 것입니다. 시장에서 내 점포로 다른 플레이어의 점포를 차내는 것은 루나와 흡사하고, 토큰을 비공개로 골라서 동시에 모두 공개하는 것은 수많은 게임에서 이미 본 적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디자이너들은 자신이 영감을 받은 게임이 무엇인지 완전히 공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룰북 마지막 장에 이들 게임들을 명시해두었는데, 마치 '원작' 게임이 무엇인지 알아도 상관없고, 그만큼 자신들의 게임에 대한 자신감이 느껴집니다.

그럼 이렇게나 뒤죽박죽 정신없는 게임의 게임성은 과연 어떨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재미있습니다. 메커니즘과 메커니즘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느낌은 아니지만, 각각의 페이즈가 모두 매력이 있습니다. 첫 페이즈에서 카드를 어디에 깔아야 할 지 고민하는 것, 주사위를 여러개 굴린 후 내게 가장 알맞는 주사위를 고르는 것, 수송 단계에서 몇 번의 수송을 어디에 할 지 결정하는 것, 점포를 놓는 위치를 정하는 것 모두 플레이어들에게 의미있는 선택을 요구합니다. 여러 메커니즘을 뒤섞어놨지만 그것이 게임 도중에 거슬릴 일은 별로 없죠.

콤보가 많이 터지는 것도 좋은 점입니다. 이 게임은 플레이어가 콤보를 터뜨리기 위해 생각할 수 있는 대부분의 플레이를 허용합니다. 지붕 타일 및 보너스 타일도 배경에 색으로 표시된 페이즈만 주의하면 자신이 원할 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플레이어들이 계획을 잘 세운다면 이 게임은 무시무시한 콤보와 많은 승점으로 보답해줍니다.

상호 작용도 적절한 편입니다. 시장에서 남의 점포를 쫓아내는 것이 거의 유일한 공격적인 요소인데, 사실 점포는 라운드 종료 시마다 승점을 주는 역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에 내 계획이 완전히 무너진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 크게 거슬리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직관적이지 못한 게임 흐름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게임의 턴 흐름은 매우 난잡합니다. 1 페이즈 때 카드를 깔고, 깔아둔 농장에서 작물이 생산됩니다. 2 페이즈 때 주사위를 선택하여 작물과 돈을 받고, 3 페이즈 때 수송을 몇 번 할 지 선택 후 수송을 합니다. 4페이즈 때 점수를 얻고 휴식 트랙을 참조하여 턴 순서를 정합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페이즈들이 뒤섞여 있는 게임은 필연적으로 플레이어들을 혼란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페이즈들이 존재하는 설득력 있는 이유가 필요하는데, 이 부분이 상당히 아쉽습니다.

제가 이전에 리뷰를 작성한 비티컬쳐를 보면, 내가 어느 페이즈에 뭘 해야 하는지 명확합니다. 봄에 1년 계획을 세우고, 여름에 포도를 심고, 가을에 방문객을 맞이하고, 겨울에 포도를 수확하여 와인을 만들어 팔면 됩니다. 하지만 이 게임은 왜 1 페이즈 때 작물이 자동으로 생성되는지, 2 페이즈 때 주사위를 통해서 하는 행동이 뭘 의미하는지, 왜 지붕 타일을 사용하면 돼지가 튀어나오는지 별다른 설명이 없습니다. 물론 저희도 이유야 알죠. 게임을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그런거라는 것을요.

이 게임이 테마가 전혀 안 느껴지는, 메커니즘에만 치중한 게임이었으면 차라리 이런 것을 기대하지 않았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라 그랑하는 의외로 테마가 짙게 묻어나오는 게임이기에 더욱 아쉽게 느껴집니다.

다행히 이 게임의 룰북은 꽤나 잘 쓰여져있고, 턴 순서를 요약한 타일이 게임 진행에 큰 도움이 됩니다.



쓰다보니 혹평이 더 긴 것 같지만, 어찌되었건 좋은 게임입니다. 어디선가 본듯한 게임 플레이에 대한 거부감만 없으시다면, 적당히 무거운 농경 유로 게임을 찾으신다면 라 그랑하는 좋은 선택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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