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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실 나는, 교육계에 몸담았던 삼십 년 간을 되돌아보면서, 왜 가르치는 것이 나에게 항상 끔찍한 공포였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이 책을 썼다.


나는 내면에서부터 외면까지 우리의 직업을 형성하거나 붕괴시키는 지적인, 정서적인, 영적인 역동성들을 명확하게 규명하기를 희망하면서 교사라는 삶의 내면적인 풍경을 탐구했다. 나는 자신에 대한 이해를 심화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고 싶었고 그래서 나만큼 가르치는 것에 관심을 가진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원했다.


- 파커 J. 파머, "가르칠 수 있는 용기" 10주년 기념판 서문


가르칠 수 있는 용기 - 10점
파커 J. 파머 지음, 이종인 옮김/한문화


점심 약속이 10분 정도 남아서 기다릴 겸 참새가 방앗간에 들어가...알라딘 중고서점에서 들어갔습니다. 방금 들어온 책 제목들을 대충 눈으로 훑고 있는데 제목만으로 마음을 뺏긴 책이 있었습니다. "가르칠 수 있는 용기". 굉장한 제목이라 생각했습니다.


교육이란 상대방의 성장, 성숙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입니다. 대부분의 선생님과 부모님들은 학생 혹은 자녀가 긍정적인 성장을 하길 원합니다. 그러나 그런 의도를 가진 교육적 행동이 반드시 원하는 결과를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닙니다. 어떨 때는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다 주는 경우도 참 많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확신있게 교육적인 활동을 하던 사람들도 점점 자신의 말 한 마디와 행동 하나가 상대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지 느끼면 겁이 나기 시작합니다. 자칫 자신이 실수를 해서 안좋은 영향을 미칠까봐 조심스럽게 됩니다.


상담을 배우고 익히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와 유사한 감정을 느낍니다. 상담자는 내담자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말이나 행동을 자제하고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말이나 행동을 적절하게 해야 합니다. 만약 내담자의 심리적 문제가 심각한 수준이라서 상담자의 실수가 내담자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일으킬 수 있다면 무척 겁이 날 것 같습니다. 그 기분은 마치 응급 환자를 앞에 두고 매스를 쥐고 있는 의사와 비슷하지 않을까요? 


뒤돌아 보면 대학교에 들어가서 학년이 쌓이면서 후배들에게 이리저리 충고나 조언을 하던 제 모습이 참 부끄럽습니다. 당연히 좋은 의도로 했던 말들이지만, 제 말로 인해 후배들이 편견이나 선입관을 갖게 되거나, 그들 스스로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내가 박탈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런 실수를 저 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특히 부모들이) 하고 있다고 봅니다. "상대방이 실수나 실패하지 않도록 해주는 것"이 상대방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실수.



실패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들은 실패해보지 않는한 배울 수 없으면서, 동시에 너무도 중요한 것들입니다. 그런 실패를 겪지 않게 해주는 것은, 상대방에게서 그런 배움의 기회를 뺏아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교육자는 상대가 실패를 했을 때, 그 실패를 통해 "좌절감과 패배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스스로 "배움"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맡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상대를 심리적으로 지지해주고, 사회적인 안전함을 느낄 수 있게 해줘야 합니다. 상담에서 상담자의 역할을 "치료적 토양"을 제공해주는 것이라고 이야기한 로저스의 주장이 이 같은 교육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교육자의 역할가르치는 것보다 배울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해주는 것인거죠.


  • 훌륭한 가르침은 테크닉이 아니라 정체성에서 온다. 그러나 나의 정체성이 훌륭한 테크닉으로 나를 인도하는 것처럼, 테크닉도 나의 정체성이 더욱 충만해지는 데 도움을 준다.
  • 가르침은 공과 사의 교차 지점에서 발생한다. 만약 잘 가르치고 싶다면, 나는 이 양극이 교차하는 곳에서 잘 서 있는 법을 배워야 한다.
  • 지성은 감성과 함께 기능을 발휘한다. 그래서 학생들의 마음을 열고자 한다면 그들의 감성도 함께 열어야 한다.


- 파커 J. 파머, "가르칠 수 있는 용기"


위의 인용구에서 "정체성"이라는 말이 좀 어렵게 느껴지는데 이는 교육자의 태도와 품성이라고 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다만, 저자는 이 정체성에 "좋은 면"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림자와 한계, 상처와 공포, 힘과 잠재력"이 포함되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부분에서 저는 이 정체성이 교사 자기 자신의 "자존감"과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습니다.


나의 의도는 저울의 균형을 바로잡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양극화의 문화에서는 균형을 잡으려다 보면 저울이 어느 한쪽으로 쏠리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양극단 중 홀대를 받고 있는 한쪽 극단을 옹호하다 보면, 다음과 같은 오해를 받게 된다.


아, 저 사람은 교사들의 '품성'만 강조하고 그 대신 신통치 않은 테크닉은 묵과하는 사람이구나. 아, 저 사람은 진리의 절대적 기준 같은 것은 없고, 사람들의 제각각 생각이 그대로 진리가 된다고 보는 사람이구나, 자신의 '느낌을 나누기만' 한다면, 생각의 내용 따위는 신경 쓸 것 없다고 보는 사람이로구나.


이런 오해는 나의 얘기를 왜곡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문제의 양쪽 얘기를 다 들어보는 것, 혹은 두 귀로 듣는 것을 훈련받지 않았기 때문에 늘 이런 식으로 상황을 왜곡하게 된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이것 아니면 저것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세상을 전체적으로 생각' 할 수 있으면 어떤 결과가 올까? 물론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는 차별 논리를 완전히 포기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우리의 마음을 좀더 발전시켜, 좋은 교육의 바탕이 되는 상호연결성을 중시하는 관대한 마음의 습관을 기르자는 것이다.


노벨상을 수상한 물리학자 닐스 보어는 내게 하나의 이론적인 주춧돌을 마련해 주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진실된 진술의 반대는 거짓된 진술이다. 그러나 심오한 진리의 반대는 또 다른 심오한 진리가 될 수 있다."


...어떤 경우, 진실은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세상을 쪼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이것과 저것 모두를 포용하는 곳에서 발견된다. 진실은 양극의 역설적인 결합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 파커 J. 파머, "가르칠 수 있는 용기"


균형을 잡는다. 이 말이 저는 너무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성숙한 사람이란 끝없는 흔들림 속에서 계속 균형을 잡아가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한 쪽 극단으로 기울어버리기는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분법적으로 생각하고 싶어합니다. 편하거든요. 그 시소 중간에 서서 기우뚱 기우뚱하며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높은 집중력이 필요하면서도 불안한 상태를 견뎌야 가능합니다. 정신적으로만 봐도 힘듭니다.



"꿈을 이루려면 현실을 신경쓰지 마라."라는 조언이나 "꿈을 버리고 현실적으로 생각해라."라는 조언은 둘 다 틀렸다고 봅니다. 현실을 무시하면 꿈은 지속될 수 없으며, 꿈을 무시하면 현실이 무의미해집니다.


이런 균형이 중요한 예들은 우리 삶에서 가장 큰 이슈들과도 항상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성과의 관계를 보면, 육체적 사랑과 정신적 사랑. 인간은 신이 아니지만, 동시에 인간은 본능에만 충실한 동물도 아니니 균형이 필요합니다. 정치적으로 보면, 진보와 보수는 비유적으로도 양날개라고 말할 정도로 둘 사이 균형이 필요합니다. 한 쪽 날개에 치우친다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뱅뱅 제자리에서 돌기만 할 겁니다. 개인의 삶에서 본다면 생각과 행동. 수많은 철학자들이 이야기했듯이 생각만 앞서거나 행동만 앞서지 않고, 생각과 행동은 균형과 조화가 필요합니다.


저 보어의 말은 예전에 보았던 도올의 한신대학교 강의에서 들었던 유교에서 말하는 "중용"과 참 비슷해 보입니다.


공자는 말한다. 군자의 중용은 "시중 時中"이고, 소인의 중용은 "무기탄 無忌憚"이다. 공자의 이 언급은 천하에 둘도 없는 명언이라 할 수 있다.


중은 가운데가 아니다. (...) 다시 말해 인간의 모든 "중 中"은 "시 時" 속에 있다는 것이다. "시 時"라는 것은 객관적, 절대적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상황성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의 가치는 시時 속에 있다.


...나는 말한다. 인생이란 타이밍의 예술이다. 중中이란 오직 적절한 시時를 만날 때만이 중으로써 완성되는 것이다. 우리가 제갈공명을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의 모든 움직임이 시時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중中은 시時와 더불어 발현되는 것이다. 시간을 떠난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 도올 김용옥, "중용, 인간의 맛"


중용 인간의 맛 - 10점
도올 김용옥 지음/통나무


균형이란, 어떤 절대적인 중간 지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양쪽을 모두 품고 상황에 따라 적절한 것을 택하는 것에 가깝다고 봅니다. 물리적으로 보자면 고정된 평형 상태(정적 평형)가 아니라, 끊임없는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평형 상태(동적 평형)라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균형을 잡고 서있는 시소는 땅에 딱 붙어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배 위에 있는 시소 같이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는 셈이죠. 그 위에서 한 번 균형 맞았다고 그 위치에 가만히 서있기만 하면 파도 한 방에 내동댕이 쳐질 겁니다.


...나는 교사들로부터 매우 중요한 수업을 받았다. 그들을 통해 교육 현장에서 교사들이 겪는 좌절감과 답답함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공립학교 교사들이 처해 있는 잔인한 근무 조건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계속해서 자신들을 교실로 돌아가게 만드는 힘은 그들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책임감이었다. 또한 다른 사람이 도와주기를 기다리는 대신에 자신들 안에서 스스로를 지탱할 힘을 찾으려는 이 훌륭한 사람들의 의지가 얼마나 대단한지, 그리고 우리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 얼마나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지도 알 수 있었다.


공립학교 교사들과의 이 년 간의 경험은 나에게 그들과 그들의 동료들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진정한 문화 영웅이라는 확신을 주었다. 그들은 누구도 더 이상 치유하려고 하지 않는 사회적인 병폐로 상처를 입은 아이들을 매일같이 대해야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부적합성과 실패를 주장하는 정치가들과 일반 대중들, 그리고 언론으로부터 매일같이 몰매를 맞는다. 그리고 매일같이 그들은 자신들이 아이들을 도울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마음을 열면서 각자의 교실로 되돌아간다.


- 파커 J. 파머, "가르칠 수 있는 용기" 10주년 기념판 서문


위의 부분을 읽으면서 순간 조금 울컥했습니다. 공립학교 교사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간접적으로라도 느낄 수 있게 하는 문장이었습니다. 주변에 공립학교에서 아이들을 매일 같이 마주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머리로는 참 대단하다고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가슴으로 그게 조금 느껴진 건 처음인 것 같습니다. 저자가 교사들의 마음을 정말 잘 알아주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어쩌면 이 책은 교사들에게 치유적인 책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자인 파커 J. 파머는 교육 지도자이자 사회운동가라고 합니다. 그를 "교사들의 교사"라고 부른다는 내용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서문에서 저자가 이 책을 완성하기까지 1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는 말에 더욱더 신뢰가 갔습니다. 그래서 이 책을 지르는데 사는데 망설임이 없었습니다. (아마 제목을 본 순간 이미 결정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네요.)


각 장의 주제들도 매우 흥미롭습니다.


  1. 교사의 마음 (교사의 자아정체성과 성실성)
  2. 공포의 문화 (교육과 단절된 삶)
  3. 감추어진 전체성 (가르침과 배움의 역설)
  4. 커뮤니티 속에서 인식하기 (위대한 사물의 은총)
  5. 커뮤니티 속에서 가르치기 (주제를 중심에 둔 교육)
  6. 커뮤니티 속에서 배우기 (동료 교사들과의 대화)
  7. 더 이상 분열되지 않기 (희망의 가슴으로 가르치기)


하나하나가 너무도 중요한 근본적인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저자는 책의 거의 절반을 사용해서 "공동체 속에서"를 강조합니다. 혼자가 아닌 함께하는 삶은 무척이나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지만, 그 만큼 훨씬 어려운 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책의 4장부터 6장까지 내용이 참 궁금합니다. 저 뿐만이 아니라 우리들 대부분은 무엇인가를 혼자 하는 것이 익숙하고, 누군가와 함께 일을 해가는 것이 어렵다고 항상 느낄 테니까요. 어떻게 하면 함께 할 수 있는지 참 알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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