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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 위에서 (On The Table)
(1) 나는 무엇이 즐거운가?
보드게임을 하다보면 게임을 하면서 내 마음이 상할 때가 있다. 보통 테이블 맞은 편에 앉아있는 사람과 미묘한 어긋남이 있을 때 그렇다. 특히 답답한 경우는, 내가 무엇인가 잘못을 한 것은 아니고, 또 상대방이 잘못을 한 것을 아닌 경우다. 먼가 마음이 상했는데, 이를 표현할 대상이 참 없다.
그 순간 내 마음 상태를 예리하게 알아차리는 능력이 부족하여, 나는 시간이 흐른 뒤 계속 마음에 남아있는 찜찜함을 잠이 오지 않는 이불 속에서 뒤척거릴 때야 깨닫는다. 아, 그 사람은 나와 같은 테이블에서 같은 게임을 함께 했지만, 서로 게임 속에서 원하는 재미는 그렇게 달랐구나...
2년 전, 보드게임을 다시 접하기 시작해서 본격적으로 이 세계로 빠졌다. 수백 가지의 게임들을 다양한 사람들과 테이블 위에서 마주하고 접해보니, 점점 내가 좋아하는 게임과 싫어하는 게임을 알게 되었다. 좀 더 정확히 묘사하면 "어떤 상황"이 나에게 즐거움을 주는지, "어떤 상황"이 나에게 괴로움을 주는지를 알게 되었다.
메슬로우는 인간의 욕구를 5단계가 있다고 얘기했다. 이는 아래와 같은 순서다.
1. 생리적 욕구
2. 안전의 욕구
3. 소속감과 애정 욕구
4. 존경의 욕구
5. 자아 실현의 욕구
위의 다섯 가지 중에서 내가 보드게임을 통해서 만족하는 욕구는 3번, 4번, 5번이다.
나와 함께 게임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게 되거나 혹은 "나"에 대해 사람들이 알게되면서 즐거워지는 상황은 분명 그 사람과의 교류를 통해 소속감과 사랑의 욕구가 만족되는 순간이다. 그리고 내가 다른 사람들을 모두 경쟁에서 재치고 1등을 했을 때, 그 기쁨은 분명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 받고 싶어하는 존경의 욕구가 드러난 것이다. 그와 반대로, 내 자신의 이전 기록을 깨고 이전보다 높은 점수를 얻었을 때, 내 스스로 만들어낸 과정과 그 결과가 만족스러울때, 해결해야 하는 문제 상황을 필사적으로 뚫고 임무를 완수했을 때, 나는 스스로가 기특하고 뿌듯하다. 이는 혼자 1인 게임을 할 때도 느낄 수 있는 자아 실현의 욕구 충족이다.
나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사람들이 위의 세 가지 욕구를 게임 속에서 얻고 싶어한다. 그러나 사람마다 그 중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지 무게의 차이가 다르다. 누군가는 타인과의 교류에서 주로 즐거움을 얻고, 누군가는 타인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에 큰 즐거움을 얻고, 누군가는 자기 앞의 개인판을 알차게 꾸민 것을 보며 스스로 성장했다고 가장 뿌듯해한다. 멋대로 요약해보면, 3번은 교류의 즐거움, 4번은 경쟁적 승리, 5번은 자기 성장의 기쁨이라고 할 수 있다.
게임 중 마음이 상하는 순간들은 보통 이런 내 욕구 충족이 방해받을 때다. 이런 경우는 꽤 자주 발생한다.
<서로를 알아가는 재미가 게임이 된 "왓츠잇투야"> (사진 출처: 보드게임긱)
다른 사람과의 교류하는 즐거움은, "원치 않은 사람"과 게임을 하게되면 사라진다. 타인과의 교류가 즐거움을 주는 것은, 상대방이 최소한 나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으면서, 내가 싫어하지 않는 사람일 경우다. 친한 친구나 가족들끼리 게임을 할 경우에는 이 욕구가 그 자체만으로 만족된다. 그러나 모임에서 처음보는 사람들과 게임을 하게 되면, 충분히 친해지지 못한 상태에서는 이 욕구는 우주 밖으로 날라간다.
처음보는 사람들과 할리갈리는 하는데 낯선 남자가 내 손등을 강하게 내려찍으면, 아픈 손을 쥐고 다른 사람들이 웃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즐거울 수 있을까? 최소한 서로의 분위기나 성향을 파악한 다음에야 겨우 가능할 것이다.
누군가 4번과 5번의 욕구가 강한 사람이 있을 경우도 내 이런 교류의 즐거움이 사라질 때가 있다. 예를 들어, 딕싯 같은 게임은 서로 상대방의 의도와 마음을 읽으려고 해야 재미가 있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난 이미 1등이니까, 이번 선택에서는 내 1등을 지키기 위해 답이 아닌 것을 확신하지만 일부러 여기에 걸겠어"라고 진지하게 말한다면, 내가 원하던 재미가 그 순간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그러면서 깨닫는다, "아, 누군가는 이 순간 이기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구나."라고. 그를 비난할 자격은 내게 없지만, 나와 다른 욕구를 충족시키려 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차릴 수는 있다.
가장 쉽게 방해받는 욕구는 4번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보드게임은 경쟁 게임이기 때문에, 결국 승자와 패자로 갈린다. 누군가 승리의 기쁨을 얻으며 4번 욕구를 만족시키는 순간, 나는 4번 욕구를 포기해야 한다. 포기하지 않으면, 패배의 좌절감을 그대로 느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4번 욕구가 꽤 강한 사람이다. 이기고 싶어한다. 내가 남과 경쟁해서 승리하고 싶어하는 욕구를 충족시키는 게임은 보통 2인 게임이다. 2인용 게임은 서로의 실력 차이가 그대로 승부를 가르는 진검 승부를 추구한다. 그렇기 이겼을 때 순수하게 기뻐할 수 있고, 졌을 때 명쾌하게 실력 차이를 인정할 수 있다. 내가 열심히 하는 것과 상대를 이기려 하는 것 사이에 구분이 없다.
하지만 3인, 4인으로 인원이 늘어나면, 이제 문제는 달라진다. 내가 잘해야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나를 방해하지 않아야"만 내가 1등할 수 있다. 이른바 "킹 메이킹" 플레이가 가능한 것이 다인플 게임이다. 대부분의 게임들이 1등하는 것은 힘들어도, 다른 사람을 1등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쉬운 편이다. 특히 서로간의 상호작용이 강한 게임에서,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누군가가 특정 사람을 밀어주면 나는 이길 수 없다. 내 4번 욕구가 내 자신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영향 때문에 꺽이는 것이다. 이럴 때 나는 무엇인가 공정하지 않다고 느낀다.
그러나 킹 메이킹을 하는 사람은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 역시 4번 욕구가 실패했기 때문에 하는 행동이다. 그들은 남은 게임에서 자신의 또다른 욕구라도 충족시켜야 한다. 어떤 사람은, 특히 나 같은 사람은, 승리 욕구를 포기하고 5번 욕구, 자기 실현 욕구로 방향을 튼다. 게임 속에서 타인과의 경쟁이 아닌, 나 자신의 목표를 세워서 이를 달성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 것도 없이 게임을 계속 하는 것은 상당히 고역이다. 즐겁자고 하는 게임이 노동이나 남을 위한 봉사가 되어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새로운 욕구를 추구하려 한다. 이를 모두 킹 메이킹이라고 비난할 수는 없다.
또한 어디까지가 킹 메이킹인가를 판단하는 것은 기준을 정하기 어렵다. 누군가는 "왜 1등을 견제하지 않느냐", "왜 꼴지인 나를 방해하는 선택을 하느냐"라는 불만이 나올 수 있다. 그럼 나는 이렇게 반박하고 싶어진다. "내가 왜 당신 생각대로 플레이를 해줘야 하느냐, 나는 내 나름의 최선의 수를 향하고 있는 것이고, 내 선택이다"라고.
나 역시 누군가의 킹 메이킹으로 내 승리가 좌절되면 기분이 상한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내가 선두권에서 한참 뒤쳐졌을 때, 나만의 즐거움이라도 게임 속에서 추구하는 것이 방해받으면 또 기분이 상한다.
어디까지가 킹 메이킹이고 어디까지가 자기 나름의 목표를 둔 플레이인가, 그런 기준을 세우는 건 나에겐 불가능하다. 그저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나의 욕구"와 "상대의 욕구"가 서로를 방해할 경우, 둘 다 조금씩 상대 욕구를 존중해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 얼마전 굉장히 스스로 만족스럽게 완성시킨 팩토리 펀 게임에서의 내 공장. 92점! >
내가 게임 속에서 가장 많이 즐거움을 얻는 순간은 5번, 자아 실현의 욕구가 충족될 때이다. 처음엔 몰랐지만, 많은 게임을 많은 사람들과 플레이해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내가 퍼즐류의 게임을 선호하는 이유도, 내가 계산한 것들이 착착 맞아떨어졌을 때의 기쁨도 이 욕구에서 온다. 요즘 많은 보드게임들이 서로 상호작용이 약하고, 각자의 개인판에서 플레이하는 시스템이 많아진 것은, 이런 즐거움을 느끼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게임이란 소설, 영화 같이 주어진 흐름에 따라 수동적으로 지켜보는 다른 매체와 다르게, 주어진 규칙 속에서 내가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매체다. 게임의 가장 큰 특징이 여기에 있는데, 이 능동성을 망가뜨리면, 그건 이제 더이상 게임이 아니다.
(사진 출처: https://creativekatarsis.com/el-conde-lucanor/)
그래서 난 내가 게임할 때 누가 조언을 해주면 닥치라고 말하고 싶다. 난 내가 게임을 하고 싶지, 누군가의 로봇이 되고 싶어서 여기 앉아있는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조언을 해주는 사람은 내가 "잘하는 법"을 알게 되길 바라는 것일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실수하고, 실패해도, 내가 스스로 알아내는 과정"이 나에겐 가장 소중한 즐거움이고, 내가 게임을 하는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이기기 위해서만 게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가 선택한 행동들에 대해서 누군가가 평가하는 것도 나의 욕구를 방해한다. 내 선택이 "맞는 행동이다"라는 얘기도, "틀린 행동이다"라는 얘기도 난 듣기 싫다. 난 게임 속에서 "경험"을 하고 싶지, 시험을 보러온게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하는 상대는 또 나와는 다른 욕구를 가지고 게임을 하는 것이니, 무조건 비난까지 할 수는 없다. 이 역시 서로 상대방의 욕구를 눈치채고 어느 정도 선까지 배려해주느냐가 중요하다.
게임을 처음 하는 사람과 함께 플레이를 할 때, 나 역시도 언제나 망설여진다. 그 사람 입장에서 좋은 방법이 나에게만 보였을 때, 도와주는 것이 좋을까, 옆에서 그냥 지켜보는게 좋을까. 늘 어렵다. 하지만, 경험상, 지켜보고 후회한 경우보다, 도와주고 후회한 적이 훨씬 많았다.
(출처: EBS 다큐프라임 "마더 쇼크"중에서)
제대로 도와주는 것은 보기보다 매우 어렵다. 이는 마치, 수학을 잘하는 사람이 수학을 잘 가르치는 것은 아닌 것과 비슷하다. 진정으로 상대에게 도움이 되려면, 상대가 어디까지 게임을 이해하고 있고, 어떤 생각으로 행동을 했는지, 어디까지 도움을 받고 싶어하는지를 제대로 판단해서, 정확하게 도와주어야 한다. 이를 서툴게하면 그 사람이 게임 속에서 스스로 느끼는 재미를 망쳐버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허수아비가 되고 싶어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는 너무나 타인을 평가하고, 타인에게 지적하고, 타인에게 조언과 충고를 많이 하는 나라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회적인 편향성이 줄어들지 않으면, 우리는 일에서도 게임에서도 즐거움을 계속 빼앗기게 될 것만 같다.
무슨 게임을 하면서 이딴 생각들을 하냐라고 물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난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마음 상태에 관심이 많은 편이고, 사회는 어떻게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지 알고 싶어한다. 그리고 사람들의 모든 행동을 어떤 식으로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심리학도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게임 테이블에서는 이런 생각까지 못하고, 그저 게임에 집중하고 빠른 계산과 선택을 하는 것에 정신이 없다. 내 머리는 그리 좋은 편이 아니라서, 동시에 여러개도 못하고 기억력도 형편없다. 이런 생각들은 늘상 그렇듯이 밤에 이불킥을 하면서 떠오른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시간 같이.
사실 게임을 하면서 내가 충족시키는 욕구들은 위의 3가지 말고도 더 많다. 이들은 다음 기회에 나열해보겠다. 잠 못드는 밤은 자주 찾아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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