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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Ulrich Kersting


정말 나는 에스컬레이터에서 걸어갈만큼 급한가?


매일 매일 서울에서 이동하면서 지하철을 항상 탑니다. 지하철에서 에스컬레이터 앞에만 서면 늘 고민합니다. "왼쪽에 설까, 오른쪽에 설까?"


에스컬레이터를 타는 문화가 한 줄 서기에서 두 줄 서기로 바뀌는 중인데 사실 잘 안 바뀌고 있죠. 그러다 문득 우리가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는 모습과 현재 한국 사회가 비슷한 면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줄 서기를 하는 이유는 명쾌합니다. "급한 사람들이 좀 더 빨리 갈 수 있도록 한 쪽을 비워둔다." 남을 배려하는 아름다운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왼쪽편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이 "정말 급한 사람들일까?"


글쎄요, 저는 최소한 절반 이상은 급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급하지 않은 사람들이 왜 왼쪽으로 걸어올라가는가? 제가 생각하는 이유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느리게 가는 것이 손해인 것 같아서

2. 오른쪽 줄이 너무 길어서


여기서 1번은 "빨리 가는 것"이 이득이고 "느리게 가는 것"은 손해라는 현재 한국 사회에서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고 방식과 비슷합니다. 이런 사고 방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결과 지향적"입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더 좋은 결과를 더 빨리 내는 것입니다. 이들은 결과보다 과정에서 의미를 찾는"과정 지향적"인 사람들과는 관점이 많이 다르죠.


저는 2번에 좀 더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른쪽 줄이 너무 길어서 왼쪽에 서있다고 봅시다. 그러면 왜 걸어가는 걸까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제가 스스로 왼쪽에 섰을 때 느낀 점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2A. 뒤에 급한 사람들이 나 때문에 못 지나갈까봐

2B. 내 앞이 뻥 뚫려있으면 저절로 걷게 되서


2A의 경우, 왼쪽에서 걸어가는 것은 타인에 대한 "배려"이면서도 타인들이 주는 "압박감"입니다. 전 사실 압박감이 더 크다고 봅니다. 압박감 때문인 것을 배려라고 왜곡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사실 이 압박감을 주는 사람은 대부분 "내 머릿속에 있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냥 내 바로 뒤에 누군가 서있고, 내 앞이 뚫려있는 것 뿐인데, 나는 뒤에 사람이 앞으로 가고 싶어한다고 생각하는거죠. 전 이런 생각이 착각인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착각이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나타나면, 모두 앞으로 걸어가게 됩니다. 도미노 같죠.


2B는 앞선 1번과 조금 다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늘 무엇인가에 쫓기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분들이 아닐까 합니다. 이게 무슨 심리테스트는 아닙니다만, 왠지 이런 분들은 주변 사람들이 다들 좋다고 하는 일은 크게 고민 없이 따를 것 같습니다. 조금 자동적으로 앞으로 나가게 되는 거죠.



Photo by ŇÄĵŵÅ Ă. Мǻŗǻƒįę


현재 한국 사회가 사람들로 하여금 충분히 "안전하다 느끼게 하지 못하면서" 심하게 "불안을 느끼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사실 조금 천천히 살고 싶은데 남들보다 뒤쳐지면 내 생존이 위협받는 사회. 남들이 부러워하는 기회를 버리면 이상하게 쳐다보는 사회. 내가 계속 위로 올라가기를 기대하는 주변 사람들 때문에 나는 점점 힘들어지는 사회.


그저 개인의 선택 문제일 뿐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런 심리적인 분위기로 인해서 에스컬레이터가 자꾸 고장나면서 사고가 납니다. 한 줄 서기의 문제는 우측으로만 무게가 실리면서 균형이 깨지고 고장 빈도가 높아지는 것이죠. 어쩌면 우리 사회의 문제와도 비슷한 느낌입니다. "균형이 깨졌다"는 점에서.


그렇다면 그렇게 에스컬레이터가 고장이 날 때 누가 다칠까요?


몇 년 전 글이지만, 아지기님의 블로그 글을 보면, (아지기 : "에스컬레이터 사고 사례를 분석해보니..") 에스컬레이터 사고 중 균형을 잃어 넘어지는 사고가 가장 자주 발생합니다. 이런 사고가 에스컬레이터의 고장과 가장 관련된 사고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이 넘어지는 사고의 피해자는 대부분 50대 이상의 고령자라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에스컬레이터가 사람을 가려가면서 고장나진 않을겁니다. 다시 말하면 에스컬레이터가 고장났을 때, 적절히 대처할 힘이 없는 사람들이 피해를 본다는 거죠.


우리 개개인들이 관성적으로 하고 있는 행동들 때문에 사회 시스템은 종종 고장이 납니다. 그 때 가장 크게 피해를 보는건 "약자"들이었죠. 그리고 우리는 그건 내 일이 아니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넘어갑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하는 것은 언제든지 운이 나쁘면 우리도 순식간에 약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약자가 아닌 것은 내가 열심히 살아왔기 때문만이 아니고, 운도 좋았던 겁니다. 악운이 닥쳐온다면 우리는 순식간에 약자가 됩니다.


제가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고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제가 이타적인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이기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제가 약자가 되었을 때를 위한 보험입니다.


"아, 에스컬레이터 두 줄 서기 좀 안했다고, 사회 시스템을 고장내는 거라고 하는 건 너무 비약 아니야?"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전 세상을 바꾸는 방법은 인류 전체의 조그마한 태도의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유일한 희망이라고 생각하고요. 그런 점에서 그리 큰 비약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Photo by BK


작은 태도 변화도 사실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한 개인이 자신의 습관을 바꾸는 것은 매우 도전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모든 가치있는 일들은 도전적인 일입니다. 내가 나의 아주 사소해서 티도 안날 것 같은 작은 변화를 시도하는 것은, 사실 세상을 바꾸는 일과 동등한 가치를 지닌 시도입니다.


그런 시도를 에스컬레이터에서도 해보고 싶습니다. 잠시라도 반대쪽에 무게를 실어줘서 에스컬레이터의 균형을 도와주는 거죠. 에스컬레이터에 아무도 없을 때,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에 가만히 서있어 보는 걸로 시작해보는 시도,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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