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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50만 명의 개인별 검색 히스토리를 포햄해서 총 10억 개에 이르는 웹 검색 내용을 일일이 여과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또 에로소설 수십만 편인터넷 로맨스 소설 수천 편의 내용을 분석했다. 유동 인구가 가장 많다는 성인 웹 사이트도 총 4만 개를 들여다보았고, 성생활 파트너를 구한다는 온라인 구인 광고도 500만 개 이상을 자세히 살폈다. 그리고 온라인 게시판에 자신의 욕망을 밝힌 수천 명의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였다.

 

도대체 무슨 목적 때문이냐고?

 

바로 성욕을 자극하는 내면의 특정 신호가 남녀별로 어떤 것인지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 오기 오가스, 사이 가담, "포르노 보는 남자, 로맨스 읽는 여자"


포르노 보는 남자, 로맨스 읽는 여자 - 10점
오기 오가스 & 사이 가담 지음, 왕수민 옮김/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거짓말에 대한 책을 찾다가 제목을 보고 솔깃해서 산 책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얼마전에 메리 로취봉크를 읽으면서 갈증을 느꼈던 부분이 많았는데, 이 책이 그 부분들을 좀 시원하게 긁어준 느낌입니다. 봉크와 비교했을 때 이 책은 좀 더 분석적이고 많은 자료들을 근거로 성욕에 대한 과학적인 이해에 집중하고 있더군요. 그리고 가장 큰 차이는 이 두 과학자가 분석한 기본 데이터가 바로 "인터넷 데이터"라는 점입니다.

 

"과학적인 데이터를 손에 넣는 최고의 방법은 다름 아닌 직접적인 관찰이다. 작용을 하고 있는 대상을 바라보는 것만큼 좋은 자료 수집 방법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은하수 속의 별을 쳐다보기는 쉬워도 누구의 침실을 엿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별들은 부끄럽다고 혹은 불온한 의도를 감지하고 기분이 나빠 커튼을 확 닫아버리지는 않는다. 반면 이불 속에서 뒹굴고 있는 우리 모습을 과학자가 호기심에 차서 사진을 찍겠다고 하면 누가 가만히 있겠는가."


- 오기 오가스, 사이 가담의 "포르노 보는 남자, 로맨스 읽는 여자"


인간의 "성욕"에 대한 이해를 하기 위해서는 결국 사람들이 무엇에 성욕을 느끼는지 정보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성생활이란 사람들이 가장 공개하기 꺼려하는 내용일 뿐 아니라, 이런 연구를 사회도 잘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킨제이 같은 사람이 대단하다고 여겨지는 것이지요. 스스로를 실험 대상으로 이용하면서까지 봉크를 쓴 메리 로취도 그런 용감했던 사람이죠.

 

게다가 기존의 대부분의 연구들이 인간의 성욕에 대한 정보를 얻어내는 방법으로 설문에 의지합니다. 하지만 이는 사람들이 털어놓고 싶지 않아하는 비밀을 캐묻는 방식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죠. 좀 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성욕을 드러낼 수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그런 시도 중 하나가 이 책에서 나온 "케네스 거겐"의 심리 실험에 나옵니다.

 

"1973년에는 스와스모어 칼리지의 심리학자 케네스 거겐이 지금 같으면 윤리위원회의 승인을 받지 못했을 심리 실험을 또 하나 행한다. 그의 연구는 이렇게 묻고 있었다.

 

'절대적인 익명의 환경에 처했을 때 사람들은 과연 무슨 행동을 할 것인가?'

 

거겐은 실험에서 젊은 남자 다섯과 젊은 여자 다섯을 모은 다음, 그들을 한 사람씩 작은 방에 들어가게 했다. 이들은 모두 생면부지였고, 방에 들어가기 전에도 서로 격리되었다. 이들은 일단 방에 들어간 뒤에는 자신이 원하는 행동은 무엇이든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실험이 끝난 뒤에는 한 사람씩 방에서 나왔다.

 

그런데 이 실험을 무엇보다 흥미진진하게 만든 비밀은 바로 방에 있었다. 피험자들이 들어간 방은 칠흑같이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서로를 볼 수 없었고 알 수도 없었으며, 실험이 끝난 뒤에도 서로의 신원을 알려고 해서는 안 되었다. 다시 말해, 완전한 익명성 그 자체를 경험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익명성 속에서 만난 이 낯선 이들은 과연 무엇을 했을까?"

 

- 오기 오가스, 사이 가담, "포르노 보는 남자, 로맨스 읽는 여자

이 책의 두 저자는 이 40여 년전 실험 환경과 유사하면서도 그 규모가 어마어마한 환경이 바로 현재의 인터넷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욕망을 자발적으로 드러내는 공간인 인터넷 속에 인간의 성욕을 그대로 보여주는 어마어마한 데이터가 숨어있음을 눈치챈거죠.

 

"거겐의 이 실험이 수백 배, 수천 배, 아니 수천만 배까지 확대된 것이 바로 인터넷이다. 빛이 거의 들지 않는 깜깜한 방에 서로를 모르는 수억 명을 집어넣었다고 해보자. 고삐 풀린 듯이 자신의 욕망을 마구 표출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할까.

 

...인터넷 검색엔진은 무슨 소원이든 들어주는 디지털 세계의 지니나 다름없다. 그것도 단 한 가지 소원만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성적 관심사와 관련된 소원을 무한정 들어준다. 누구나 키보드 앞에 앉아 내숭을 버리고 자유롭게 컴퓨터 화면에서 보고 싶은 것을 정확히 표현하기만 하면 된다. '제 소원은 잭 에프론이 샤워 가운 입은 모습을 보는 것이에요'하고 말이다."

 

- 오기 오가스, 사이 가담, "포르노 보는 남자, 로맨스 읽는 여자"

 

이 책에서 알고자 하는 것은 "무엇"에 남자와 여자는 성욕을 느끼는가만이 아니라 "왜" 그런 식으로 남녀의 성욕이 나타나는가까지 답하고 있습니다. 


 이 중 "무엇"에 대한 질문은 가장 객관적인 자료인 인터넷 정보를 중심으로 답하고, "왜"라는 질문은 동물들을 대상으로한 실험들과 인간을 대상으로한 심리 실험들과 성산업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주장합니다. 이들이 인용하는 자료의 양이 상당합니다. 주석과 참고 문헌 목록이 책의 뒷쪽에 모아져 있는데 이 분량이 책의 1/5을 차지합니다.

 

"먹을거리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 이토록 다양한데, 인간이 본래적으로 느낄 수 있는 맛이 몇 가지로 한정된다는 것이 정말 말이 될까. 하지만 정말로 맛을 인지하는 우리의 마음 소프트웨어는 다섯 가지의 입력, 즉 단맛, 짠맛, 신맛, 매운맛, 쓴맛에만 반응할 뿐이다.

 

이 책에서는 성욕 소프트웨어도 미각 소프트웨어와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할 것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미각 신호와 성욕 신호는 한 가지 점에서 중대한 차이를 보인다. 성욕 신호는 성별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남녀의 두뇌 모두 똑같은 미각 신호를 감지하도록 설계되어 있지만, 성적 신호와 관련해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남자가 짠맛과 신맛 신호 감지기를 가지고 태어났다면, 여자는 단맛과 쓴맛 신호 감지기를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똑같은 땅콩 캔디를 먹고도 맛을 다르게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남자가 사탕에서 짠맛이 난다고 이야기하면, 여자는 그것을 달콤하다고 표현하는 식이다."


- 오기 오가스, 사이 가담, "포르노 보는 남자, 로맨스 읽는 여자"

 

두 저자가 인간의 성욕을 이해하는 기본적인 관점은 진화론입니다.

 

"적응주의 관점에서는 남성과 여성의 성욕을 기능적인 측면에서 바라본다. 즉, 남녀는 진화를 거치는 동안 여러 가지 선택의 압력에 맞닥뜨리는데 거기에서 발생하는 부산물이 바로 성욕이라는 것이다."

 

- 오기 오가스, 사이 가담, "포르노 보는 남자, 로맨스 읽는 여자"의 캐서린 새먼의 추천사 중

 

남자와 여자 모두 근본적으로 자신의 유전자를 가진 자식을 남기기를 추구한다게 기본 전제입니다. 이를 위한 가장 유리한 방법이 무엇인지 오랜 세월 강구해왔고, 그 결과가 현재 남녀가 성욕을 느끼는 차이라는 설명입니다.

 

책에는 굉장히 흥미로운 실험과 통계들이 가득합니다. 개인적으로 남녀의 성욕 차이를 가장 인상적으로 보여준 실험은 메러디스 치버스의 2004년 실험이었습니다.

 

"치버스는 여자들을 실험실로 부른 다음 갖가지 에로틱한 사진을 보여주고, 여자들이 사진을 보고 얼마나 흥분하는지 두 가지 방식으로 측정했다.

 

먼저 피험자들에게 어떤 느낌인지를 직접 물어보는 것으로, 이는 의식적이고 '심리적인' 흥분에 해당한다. 두 번째 방법으로는 여자들의 음문에 체적변동기록계를 삽입했다. 이 체적변동기록계는 여자들 음문 벽의 혈류, 즉 '신체적인' 흥분 정도를 측정하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치버스의 실험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다름 아닌 그녀가 피험자들에게 보여준 사진이었다. 치버스가 보여준 사진에는 남자가 운동하는 모습, 여자가 운동하는 모습, 게이의 섹스 모습, 레즈비언의 섹스 모습, 이성애자의 섹스 모습과 원숭이의 섹스 모습이 들어 있었다.

 

그렇다면 이 중에서 여자들을 '신체적으로' 흥분시킨 이미지는 어떤 것이었을까? 답은 '모두 다'였다. 심지어 원숭이 포르노까지 여자들에게 신체적 흥분을 일으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여자들을 '심리적으로' 흥분시킨 이미지, 즉 여자들 자신이 흥분했다고 '말한' 이미지는 어떤 것이었을까? 이성애자의 섹스가 심리적 흥분을 가장 많이 일으킨 것으로 나타났고, 그다음이 레즈비언 섹스였다. 사람들이 운동하는 모습은 그다지 흥분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렇다면 원숭이 포르노를 보고 심리적 흥분을 느꼈다고 말한 사람은 얼마나 될까? 이 수치가 무엇보다 중요한데, 바로 '0'이었다.

 

다시 말해 마음의 의식적인 흥분몸의 무의식적인 혹은 반의식적인 흥분일치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남자들을 대상으로 하나부터 열까지 이와 똑같은 실험을 했을 때는 심리적 흥분이나 신체적 흥분이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남자는 '신체적으로' 흥분하면 '심리적으로도' 흥분했다."


- 오기 오가스, 사이 가담, "포르노 보는 남자, 로맨스 읽는 여자"

 

Photo by ahmed mando

 

치버스는 이후 기존에 약 40년간 있었던 132가지 실험들을 살펴보면서 동일한 결과를 확인했습니다. 이 남녀의 성욕 매커니즘의 차이를 저자들이 두 가지 비유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논리 회로에서 ORAND입니다. 남자들은 OR회로처럼 여러가지 조건들 중에 하나라도 만족되면 심리적 흥분을 얻을 수 있지만, 여자들은 AND회로처럼 여러가지 조건들 중에 하나라도 만족되지 못하면 심리적 흥분을 얻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를 좀 더 직관적이면서 문학적인 비유로 표현한 것이 엘머 퍼드와 미스 마플 탐정 사무소입니다.


"외롭고, 빨리 흥분하며, 목표가 있어야 하고, 목표를 반드시 가져야 하는 것이, 그리고 어찌 보면 약간 바보 같기도 한 것이 남자의 성욕이다. 다시 말해 남자의 두뇌에 들어 있는 성욕 소프트웨어는 꼭 엘머 퍼드 같다. <루니툰> 만화에서 벅스 버니와 대조되어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연출하는 그 퍼드 말이다.

 

퍼드는 늘 '토끼 (퍼드식으로 하면 와빗)'를 잡으려고 안달이다. 퍼드는 혼자 일하는 것을 좋아하는 외로운 사냥꾼에, 총질을 무엇보다 좋아한다. 와빗이 (혹은 자기가 와빗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눈에 띄는 순간 방아쇠를 힘껏 잡아당겨 총을 발사한다."

 

"진화의 관점에서 봤을 때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안정되고 장기적이고 아이를 돌봐주는 강하고 점잖은 남자에게만 성적 욕구를 표현한 여자들의 아이들이 무턱대고 성적 욕구를 표현한 여자들의 아이들보다 오래 살아남았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현대의 여성들은 모두 여성 특유의 조심성이 응축된 결과물이다.

 

모계의 조상들이 대대로 충동의 가지를 끊이지 않고 쳐낸 결과 여자들은 지구 상에서 가장 정교한 신경 소프트웨어를 두뇌 속에 지니게 되었다. 이 시스템으로 여자들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많은 정보를 밝혀내고, 정밀하게 조사하고, 평가한다. 여자들의 이러한 신경 구조에 우리는 '미스 마플 탐정 사무소'라는 이름을 붙였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에 나오는 미스 마플처럼, 여자들의 탐정 사무소는 잠재 파트너의 성격과 관련된 갖가지 증거를 가지고 고민을 거듭하고, 신체 및 사회적 환경에서 나온 실마리들을 이리저리 재며, 섹스를 허락하기 (혹은 자신이 섹스에 나서기) 전에 스스로의 경험이나 느낌은 어떤지 면밀히 따진다."


- 오기 오가스, 사이 가담, "포르노 보는 남자, 로맨스 읽는 여자"

 

남녀의 성욕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이 책의 제목인 포르노로맨스입니다.

 

남자가 심리적 흥분을 얻기 위해서는 시각 정보만으로 충분합니다. 하지만 여자에게는 시각 정보만으로는 심리적 흥분을 얻을 수 없으며 이야기의 맥락과 각 인물들에 대한 자세한 묘사를 알려줘야만 심리적 흥분까지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남자들의 성욕을 자극하는 신호들이 잔뜩 포함된 것이 포르노이며, 여자들의 성욕을 자극하는 신호들이 가득한 것이 로맨스입니다.

 

책의 내용이 워낙 흥미롭고 내용도 어렵지 않으면서 재밌어서 몰입해서 금방 다 읽었습니다. 뒤쪽에 인용문에 대한 부연 설명도 다 읽고 싶을 만큼 남자와 여자의 성욕에 대한 개인적 호기심과 함께 학문적 호기심을 모두 채워주는 책입니다.

 

개인적으로 특히 이 책이 좋았던 점은 남자들의 성욕과 여자들의 성욕을 "다름"에 관점에서 동등한 것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남자들이 포르노를 보는 행위는 당당히 말하면 흠이 되지만, 여자들이 로맨스를 읽는 행위는 당당히 말해도 흠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좀 안쓰러웠습니다. 남자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 가슴를 언급하는 것과 여자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의 키를 언급하는 것이 동등하게 취급되지 못한다는 것이 좀 억울하기도 합니다.

 

이 책은 남자와 여자의 심리적 차이를 서로 이해하기 위해서, 남녀 모두에게 꼭 필요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ps. 노파심에 하는 말이지만, 이 책은 과학 연구의 한계상 개개인 특성보다 통계 수치에 초점을 맞추어서 남자와 여자를 이해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서문에 "개개인의 욕망과 경험의 조합은 저마다 독특해서, 똑같은 경우는 그 어디에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언급한 것을 명심하고 이 책의 내용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남자가 여자의 에로물을 접해보고 여자가 남자의 에로물을 접해보면,

남녀 사이의 아득한 심리적 간극에 무엇이 있는지 들여다볼 수 있다."


- 도널드 시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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